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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전역 독립운동 재조명 움직임 활발···독립운동 단체 '역사 되찾기 계속할 것'

한국 정부가 독립운동 유적지인 전투비행학교에 실사단을 파견 부지 보존 계획을 추진 중〈본지 7월 29일 A-1면>인 가운데 한인사회에서도 한인 독립운동사의 재조명 움직임이 활발해지고 있다. 독립운동 단체 등 관계자들은 전투비행학교의 박물관이나 전시관 활용 추진을 계기로 미 전역의 독립운동 유적지 발굴에도 적극 나서야 한다는 입장이다. LA흥사단의 장형국 회장은 "당시 상황에서 전투비행학교라는 특별한 사업이 가주에서 벌어졌고 이를 보존하는 계획은 고무적인 일"이라며 "흥사단 또한 편찬위원회를 구성해 미국 전역에 퍼져있는 우리의 역사 발굴을 계속해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대한인국민회의 송재승 이사장은 "비행학교는 나라를 잃었던 시절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미주 한인들의 힘으로 세워진 한인 이민사의 커다란 획"이라며 "한국 정부의 독립운동 유적지 발굴 사업을 계기로 미주 한인사회에 이민 선조들의 조국애와 희생 헌신 등을 되새기는 기폭제가 됐다"고 말했다. 송 이사장은 또 "이러한 이민 선조들의 노력은 미주 한인사회를 지탱해 나가는 힘"이라며 "한국 정부가 나서는만큼 앞으로 미주 한인 역사지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이 필요할 때"라고 강조했다. 이에 대해 친일 진상규명 위원회 조사관인 홍윤정 박사는 "비행 학교에 대한 한국 정부의 실사단 파견으로 자칫 사라질뻔 했던 우리의 현대사와 미주 한인 이민 역사에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며 "정부 차원에서 독립 유적지 복원 사업이 진행되는 것은 환영할 일이며 미국 전체에 퍼져있는 또 다른 유적지에 대한 조사도 이어질 것"이라고 기대감을 나타냈다. 한편 전투비행학교는 일제 강점기 당시인 지난 1920년 2월 북가주 윌로우스(Willows)시 인근에 세워졌다. 곽재민 기자 jmkwak@koreadaily.com

2009-07-30

[사설] '한인 독립운동사' 다시 쓰자

한국 정부가 일제 강점기 북가주에 세워졌던 독립군 양성 전투비행학교 부지를 매입해 박물관이나 전시관으로 만들겠다는 계획은 뒤늦은 감은 들지만 반가운 일이다. 미주 한인 독립운동사를 재조명하는 계기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1920년 샌프란시스코 인근에 세워진 전투비행학교는 이민 선조들의 나라사랑 정신이 고스란히 담긴 곳이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 싸울 공군을 직접 양성하겠다는 대단한 포부가 출발점이었다. 필요한 자금도 직접 마련했다. 그러나 그동안 전투비행학교는 '잊혀진 역사'였다. 지난 4월 '아름다운 영웅 김영옥'의 저자 한우성씨가 본지에 이 학교에 관한 내용을 연재함으로써 비로소 그 존재가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한씨에 따르면 전투비행학교는 최소 1년 6개월 정도 운영됐고 수십 명의 한인청년들을 비행사로 훈련시켰다. 임시정부는 이 곳 출신으로 비행사가 된 인물 가운데 최소 2명을 (독립군) 비행장교로 공식 임관시키기도 했다. 그러나 유념해야 할 것은 이번 일이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소중한 유물들이 훼손되고 유적지가 방치되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 정부는 물론 한인사회도 역사를 찾는 일에 적극 나서야 한다. 초기 우리의 이민 선조들은 지난한 세월을 보냈다. 농장 일꾼으로 혹은 공사장 인부로 일하며 힘겨운 생활을 이어갔다. 그러나 애국심만은 누구 못지 않았다. 그렇지만 안타깝게도 그들의 숭고한 정신은 제대로 이어지지 못하고 있다. 전투비행학교 부지 매입이 미주 전역에 산재한 한인 독립운동사에 대한 재조사와 재평가 작업으로 확대되어야 하는 이유다.

2009-07-29

본지 발굴취재 '임정 북가주 전투비행학교'···한국 정부 '부지 보존'

한국 정부가 일제 강점기 당시 독립군 공군 양성을 목적으로 북가주에 설립됐던 전투비행학교 부지 매입을 추진하고 있어 관심을 모으고 있다. 국가보훈처와 광복회 독립기념관 등 3개 기관은 오는 9월 샌프란시스코에서 북쪽으로 143마일 떨어진 윌로우스(Willows)시 인근에 개설됐던 전투비행학교 부지에 실사단을 파견 독립운동 유적지 발굴 사업을 위한 사전 조사에 착수할 예정인 것으로 알려졌다. 한인 초기 이민사의 중요한 역사적 자료인 전투비행학교는 실사를 거쳐 매입 작업이 끝나면 역사 발물관이나 전시관 등으로 활용될 예정이다. 광복회의 임종선 의전부장은 "3개 기관이 독립운동 유적지인 전투비행학교에 실사단 파견을 합의했으며 정확한 일정을 조정 중"이라고 밝혔다. 전투비행학교는 지난 1920년 2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독립군 공군 양성을 목적으로 북가주 글렌카운티의 작은 농촌 마을에 40에이커의 부지를 구매해 설립했다. 비행학교 설립엔 재미한인 백만장자로 독립운동가였던 김종림 선생의 전폭적인 지원속에 노백린 임시정부 초대 군무총장(현재 국방장관)이 설립을 주도한 것으로 알려졌다. 비행학교엔 그 당시 최첨단 훈련기 중 하나인 '스탠다드 J-1'기 3기가 마련됐으며 한인 청년들을 상대로 비행기 조종 및 정비 무선통신 군사학 등을 교육했다. 또한 이 곳에서 비행사 훈련을 받은 훈련생 중 2명은 임시정부의 독립군 비행장교로 공식 임관되기도 했다. 한국인 최초의 파일럿으로 육군 비행병참위(소위)로 임명된 박희성과 이용근이 그들이다. 친일 진상규명 위원회 조사관인 홍윤정 박사는 "1차 세계대전 후 공군의 중요성이 대두됐으며 일제 강점기 시절 미주 한인 사회의 기반하에 설립된 한인들만을 위한 비행 학교"라고 강조했다. 곽재민 기자

2009-07-28

[숨겨진 미주 독립운동사] 임시정부 전투비행학교<끝>

한국이 일제 식민지로 전락해 있던 암울한 시절 재미한인들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협력해 캘리포니아에 비행학교를 세워 독립군 공군을 양성하면서 보였던 희생과 헌신은 한국현대사에도 한인이민사에도 길이 빛날 자랑스러운 역사의 조각이다. 그것은 또한 우리가 잊고 있던 우리의 모습이기도 하다. 이 비행학교 이야기의 요지는 지금까지 중앙일보 보도와 같이 임정이 노백린 군무총장의 리더십과 재미한인들의 헌신을 바탕으로 1920 년 2 월부터 1 년여에 걸쳐 독립군 공군 양성을 위해 북가주 윌로우스 일원에 전투비행학교를 설치하고 조종사를 양성했다는 것이다. 최초의 재미동포 백만장자인 김종림 선생은 요즘 가치로 900 만 달러 이상 될 것으로 보이는 거액을 희사했으며 박희성.이용근.한장호.이초를 포함하는 최소 수십 명의 한인청년들이 이곳에서 조국 독립을 위해 젊음을 바쳤다. 이들 가운데 박희성과 이용근은 임정에 의해 공식적으로 비행장교로 임명됨으로써 이 비행학교와 오늘날 한국 공군사관학교의 법통이 이어질 수 있는 연결고리가 됐다. 하늘을 통한 독립이라는 한인들의 꿈은 인천 출신으로 북가주에 살던 한인청년 조지 리가 한민족 최초의 파일럿으로 날아오르면서 제 1 차 세계대전에서 156 회 출격을 기록하는 전쟁영웅으로 남게 했다. 당시 임정과 재미한인사회의 조종사 양성과 공군 창설 노력은 단기적으로 꽃을 피우지 못했으나 결국 대한민국 수립 후 공군창설로 계승됐다. 이 비행학교 이야기는 미주 중앙일보 한국 주간조선 조선닷컴 SBS 라디오 등 주요 언론의 보도가 계속되고 중국의 조선족 언론까지 관심을 가지면서 여러 가지 일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고 있다. 우선 한국은 학교 건물과 부지를 구입해 박물관으로 전환하는 등 역사의 현장으로 보존하기 위해 조만간 현지에 실사단을 파견한다는 계획이다. 공식 홈페이지에서 공군의 연원이 이 비행학교라고 자부해 왔던 한국 공군 역시 공군역사기록단과 공군사관학교를 필두로 이 사안을 종합적으로 다시 검토를 시작했다. 한국 교육계는 금년에 개편하는 고교 1 학년용 교과서부터 이 내용을 소개할 계획이며 이 비행학교 이야기를 다큐멘터리 필름으로 제작할 의사를 표명한 방송인이나 또는 필름 제작자들 또한 이미 여럿이다. 그러나 원래부터 이 비행학교의 구상과 창설에서 참여와 운영에 이르기까지 이 부분 역사의 주인공은 임정과 함께 재미한인들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사안과 관련돼 앞으로 진행될 것으로 보이는 모든 일은 본국 정부와 사회에만 맡겨둘 것이 아니다. 명문대학에 자녀를 보내는 것만이 좋은 교육의 전부는 아닐 것이다. 비행학교에 대한 보다 확실한 실체 규명 현지 건물과 부지의 보존과 복원 김종림의 훈격 재조정 박희성 등의 독립유공자 인정 등 숙제도 많다. 90 년 전 선조의 자랑스러운 이야기를 잘 보존해 90 년 후 후세에게 물려주는 것도 오늘을 사는 우리들의 몫 아니겠는가. <한우성 기고> wshan416@stanford.edu

2009-05-07

[숨겨진 미주 독립운동사] 임시정부 전투비행학교<17>

1920년 10월 폭풍우로 김종림의 쌀농사가 결정적 타격을 입고 비행학교의 실체적 기능이 정지되면서 임정의 독립군 공군 양성 계획도 표류했으나 공군을 갖고자 하는 꿈 자체를 버린 것은 아니었다. 사실상 비행학교를 태동시켰던 모든 요소 가운데 변한 것은 비행학교 재정을 도맡다시피 했던 김종림의 재정상태 하나였다. 게다가 비행학교를 주도한 노백린이나 김종림은 상식을 뛰어넘는 강인한 의지의 소유자였고 무엇보다 비행학교 최대의 재정후원자였던 김종림은 1921년에도 전해와 같은 규모로 농장을 경영하고 있었다. 한인들은 비행학교를 다시 열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기울였던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윌로우스 데일리 저널' 1921년 6월 1일자는 "퀸트에 있던 한국인 비행훈련장을 다시 열기 위해 노력이 경주되고 있다는 언급이 오늘 있었다."고 보도했으며 신한민보 1921년 8월 25일자는 비행학생 지원을 위한 재미한인사회의 기부자 명단을 게재했다. 임정이 1921년 7월 18일 이 비행학교 출신으로 조종사가 된 인물 가운데 박희성과 이용근을 육군 비행병참위(소위)로 임명했을 때만 해도 독립군 공군 양성이라는 계획은 진행형인 사안이었다. 그러나 김종림의 사업이 과거의 영광을 재현하지 못하면서 이 비행학교는 결국 다시 날지 못했고 이곳 출신들도 뿔뿔이 흩어져 민간인으로 독립운동을 계속하거나 미군이나 중국군에 들어가 직·간접적으로 대일전쟁에 참가하기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들 가운데 김자중은 중국 동삼성을 무대로 항일투쟁을 벌였던 군벌 장작림의 항공대에서 활약했고 이초는 미국 전략첩보국(OSS: 미국 중앙정보국의 전신)이 주도했던 한반도 침투작전인 납코(NAPCO) 작전에 참가한 것으로 주장된다. 상해 임시정부는 윌로우스에 세웠던 한인비행학교가 날개를 접자 중국군이나 소련군 비행학교에 한인청년들을 파견해 조종사로 훈련시키는 방식으로 선회했으나 이 역시 독립군 공군 창설이라는 꿈을 이루지는 못했다. 그러나 홍선표 박사(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책임연구원)에 따르면 윌로우스에 세웠던 한인비행학교는 해방 후 한국 공군 창설의 기원을 이루게 함으로써 한국군 역사에 놀라운 업적으로 이어졌다. 홍윤정 박사(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조사관)는 "임정은 독자적 비행대를 편성하려 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1943년 8월 공군설계위원회조례를 공포해 공군을 창설하려 했으나 결실을 맺지 못했고 1945년 3월 미군과 합작으로 한국공군 창설 계획을 수립했으나 일본의 무조건 항복으로 시행되지 못했다."면서 "그러나 임정의 조종사 양성과 공군 창설 노력은 대한민국 수립 후 공군창설로 계승됐다."고 강조했다. 한국 공군은 공식 홈페이지에서 공군의 연원이 윌로우스 한인비행학교라고 자부하고 있다. 조국 독립이라는 염원 속에 독립군 공군 양성을 위해 재미한인사회가 보였던 희생과 헌신은 한국현대사와 미주한인이민사에 길이 빛날 조각이다. <한우성 기고> wshan416@stanford.edu

2009-05-06

[숨겨진 미주 독립운동사] 임시정부 전투비행학교<16>

비행가양성사 총재였던 김종림은 1921년 4월 10일 박희성 등 3명이 조종사 자격시험을 치르다 기체사고로 추락해 중상을 입은 건과 관련 비행기를 빌려준 백인에 대한 보상 등을 위해 재미한인사회의 재정지원을 청하며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에 보낸 청원서를 통해 "본사는 …(중략)… 할 수 없이 중도에 폐하게 되었음에 진실로 눈물을 뿌리며 슬픔을 익히지 못하겠음으로"라며 비행가양성사 폐쇄를 알렸다.(1921년 5월 5일자 신한민보 게재) 비행가양성사는 비행가양성소(비행학교)를 지원하기 위해 조직을 체계화하면서 1920년 7월 공식적으로 출범시켰던 비행학교의 상급기관으로 김종림이 총재를 맡고 있었다. 따라서 비행가양성사는 공식적으로는 1920년 7월 25일 설립돼 1921년 4월11일~5월5일 사이에 폐쇄됐다. 비행가양성사 폐쇄가 곧 바로 비행가양성소(비행학교) 폐쇄를 의미하는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비행학교는 1920년 2월 20일 또는 그 전에 시작돼 같은 해 10~12월 실체적 기능은 정지된 것 같다. 김종림은 1920년 10월 폭풍우로 결정적 타격을 입었으나 이듬해에도 같은 규모로 농원을 계속하며 비행학교를 재건하려 분투했다. 김종림이 폭풍우로 타격을 입은 지 꼭 1년만인 1921년10월 신한민보는 북가주 순행기에서 "10월 16일 김종림씨 댁에 당도하니 이는 광대하고 청결한 양옥인데 방안제구가 과연 부자의 집이라 할 만하고 또한 말과 뜰이 광활한데 이는 세집이 아니고"라면서 그의 농원에 대해서도 "10월 18일 김종림씨의 농원에 당도하니 망망하고 가히 없는 3300 에이커의 광대한 농원"이라고 기록해 이 때까지만 해도 김종림의 경제적 기반이 완전히 와해되지는 않은 상태임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김종림은 결국 쌀농사에서 재기하기 못했다. 그는 이후에도 서비스 업종을 주로 하는 윤년식산회사 농산물 유통업체인 리들리 건제회사 북부인흥정농민사 간장업체인 중미식물회사를 운영하는 등 재기를 시도하지만 다시는 옛 영화를 회복하지 못했다. 김종림은 89년에 걸친 파란만장하고 이타적이며 애국적인 삶을 뒤로 하고 1973년 로스앤젤레스에서 쓸쓸히 세상을 떠났고 한국정부는 그가 세상을 떠난 지 32년만인 2005년에 이르러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애족장은 건국훈장 가운데 가장 등급이 낮은 5등급이다. 이와 관련 그의 업적을 잘 아는 김지수 2009년 LA애국선열추모위원장이나 장태한 캘리포니아주립대 교수(UC Riverside 소수인종학) 같은 인사들은 "김종림의 업적은 현저히 저평가돼 있다. 조속히 재평가돼야 옳다."고 강조했다. 국가보훈처는 로스앤젤레스 일원 잉글우드 공동묘지에 영면해 있는 김종림의 유해를 지난 4월 13일 임시정부 수립 90주년에 맞춰 국립대전현충원으로 봉환할 계획이었으나 잉글우드 묘지관리 규정으로 인해 봉환은 다음 기회로 미루어졌다. <한우성 기고> wshan416@stanford.edu

2009-05-05

[숨겨진 미주 독립운동사] 임시정부 전투비행학교<15>

임시정부가 박희성과 이용근의 공식 직위를 육군 비행병 참위(오늘날 소위)로 했던 이유는 임정 역시 미국 독일 일본 등 그 시대의 다른 열강들과 마찬가지로 제1차 세계대전을 거치며 등장하기 시작한 새로운 군사력인 공군에 대해 독립적 군제가 아니라 전통적 군사력인 육군이나 해군에 속하는 육군항공대나 해군항공대 같은 식의 개념을 가졌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 비행학교는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남에 따라 캘리포니아가 누렸던 곡물특수가 없어지면서 쌀농사를 통해 큰돈을 벌었던 한인들의 경제력이 흔들리는 가운데 보다 직접적으로는 특히 1920년 10월 폭풍우로 김종림의 사업이 결정적 타격을 입으면서 날개를 접기 시작했다. 북가주 글렌카운티에서 발행되던 미국신문 '글렌 트랜스크립트'(Glenn Transcript) 1920년 10월 13일자(원래 신문에는 발행일이 1921년으로 인쇄돼 있으나 이것은 오류)는 "불행히도 지난주 폭풍우로 '김 앤 포터'(Kim and Porter)가 피해자 가운데 하나가 됐다. 이들은 (잘 영글어 이삭이) 무거운 벼가 1700에이커나 되는데 벼들이 절망적으로 넘어졌다."고 보도했다. '김 앤 포터'는 김종림의 쌀농사 업체였다. 이 신문은 계속해서 "이 때문에 전량을 인력으로 수확해야 한다. 이들은(김종림 일행을 지칭) 어제 이곳에 와 계약을 체결하고 힌두인 200명을 고용했는데 일인당 인건비가 하루 4달러에 숙식도 제공해야 한다. 기계 수확이 1에이커에 10달러면 되는 것을 고려하면 이 회사가 폭풍우로 입은 타격은 쉽게 짐작될 것"이라고 썼다. 김종림은 지금까지는 알려진 바와는 달리 1920년 11~12월 발생한 폭우와 홍수로 직접 타격을 입은 것이 아니라 같은 해 10월 3~9일 주간 윌로우스 일원에 내린 폭풍우로 벼가 너무 누워 기계 추수가 불가능해 인건비 부담이 너무 컸고 이후 기온도 예년보다 낮아 추수가 계속 연기되면서 부담이 가중됐던 것으로 보인다. 김종림과 함께 이 비행학교 후원에 적극적이었던 다른 농장의 한인들도 사정은 그와 본질적으로 마찬가지였다. 이로 인해 재미한인사회의 정치적 경제적 무게 중심은 샌프란시스코 윌로우스 등을 중심으로 하는 캘리포니아 북부에서 로스앤젤레스를 중심으로 하는 남부로 움직이기 시작했고 비즈니스의 중심도 농업에서 상업으로 바뀌어갔다. 김종림의 막내아들 김두원씨는 "선친이 이 해 농사만 마치고 은퇴할 계획이었다고 어머니가 생전에 전했다"고 최근 인터뷰를 통해 밝혔다. 이 증언은 김종림이 1차대전 종전에 따라 쌀 특수가 끝난 것으로 보고 쌀농사에서 곧 손을 뗄 계획이었음을 시사한다. 캘리포니아에서는 통상 10월 첫째 주부터 쌀 수확을 시작하므로 김종림의 농장이 1920년 10월 둘째 주에 발생한 폭풍우에 며칠만이라도 앞서 수확에 착수해 그 엄청난 부를 지켰다면 비행학교와 독립군 공군은 어떻게 됐을까 깊은 아쉬움이 남는 대목이다. <한우성 기고> wshan416@stanford.edu

2009-05-04

[숨겨진 미주 독립운동사] 임시정부 전투 비행학교<14>

박희성이 레드우드비행학교에서 처음 조종사 자격증 시험을 치르던 날 기체사고가 난 비행기는 원래 새크라멘토 비행학교의 백인 비행교관 소유로 박희성과 이용근 등 한인학생들의 애국심에 감동해 무료로 빌려준 비행기였다. 박희성의 이날 사고에 대해서는 현지의 미국언론도 관심을 보여 '윌로우스 데일리 저널'(Willows Daily Journal)과 '글렌 트랜스립트(Glenn Transcript)'도 게재하고 있다. 박희성은 타고난 강골인 듯 불과 3주도 못돼 퇴원해 다음 달인 5월 22일 새크라멘토 비행장에서 조종사자격증 시험의 마지막 절차만 다시 치르고 합격했으며 두 달 후인 1921년 7월 7일 국제항공연맹(FIA)으로부터 조종사자격증을 받았다. 박희성이 새크라멘토 비행장에서 시험을 치르던 날 이용근도 같이 시험을 치르고 합격해 국제항공연맹으로부터 조종사자격증을 받았다. 이용근은 원래 박희성이 사고가 나던 4월 10일 박희성에 이어 시험을 치를 계획이었으나 박희성의 비행기가 기체고장으로 추락해 산산조각 나는 바람에 시험도 치르지 못한 터였다. 이용근은 임정이 윌로우스에 비행학교를 세우기 전부터 캘리포니아주 레드우드시티에 있는 미국인 비행학교에서 한장호.장병훈 등과 함께 비행술을 배우고 있었으며 1920년 6월 17일 이곳 과정을 마친 다음 임정의 비행학교로 옮겼다. 노백린 군무총장이 윌로우스에 비행학교를 세우기 위해 레드우드비행학교를 방문했을 때 이용근 등 한인학생 6명이 노백린과 함께 촬영했던 기념사진은 당시 독립신문에도 크게 보도돼 조선에서 독립운동의 의지를 다시 불태우게 했으며 오늘날 한국 공군박물관에도 자랑스럽게 전시돼 있다. 이용근은 1890년 평남 강서군에서 태어나 숭실중학(1906-1911)과 평양 관립일어학교(1911-1912)를 마친 후 조선에서 3년간 교사 생활을 하다가 1916년 미국으로 왔다. 이용근은 처음 캘리포니아 북부에서 1~2년 농장일을 하다가 1917년 로스앤젤레스로 옮겼으며 이곳에서 흥사단에 가입해 흥사단 제80단우가 됐다. 임정은 1921월 7월 14일 정례국무회의에서 박희성과 이용근을 비행장교로 임관시키고 그간의 노고를 치하하기 위해 포상금도 주기로 결정했다. 이에 따른 공식적인 임관명령은 이로부터 4일 후인 7월 18일에 있었다. 그러나 박희성은 추락사고 부상으로 후유증에 시달리며 고통스럽게 살면서 결국 독립전쟁에 참가하지 못했으며 그렇게도 원하던 조국의 독립도 보지 못한 채 41세에 불과한 나이로 1937년 로스앤젤레스에서 숨을 거뒀다. 그가 영면해 있는 로스앤젤레스 도심 공동묘지는 일본인들이 애용하는 곳으로 변해 아키히토 일왕이 왕세자 시절 기념식수를 했던 곳이다. 박희성은 바로 그 기념식수에서 몇 미터 떨어지지 않은 곳에 일본인들의 묘에 둘러싸인 채 잠들어 있고 묘비명 'Son of Korea'(한국의 아들)와 태극문양만이 외롭게 그를 지키고 있다. <한우성 기고> wshan416@stanford.edu

2009-05-03

[숨겨진 미주 독립운동사] 임시정부 전투비행학교<13>

임정은 이 비행학교 출신인 박희성(1896-1937)과 이용근(1890~?)을 1921년 7월 18일 독립군 비행장교로 공식적으로 임명했다. 이 비행학교에 대해 잘 아는 학자들이 오는 6월 10일로 창설 60주년을 맞는 한국 공군사관학교가 이 비행학교의 법통을 잇는다고 믿는 가장 중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다. 박희성의 유족에 따르면 그는 1910년대 후반 연희전문(연세대학교의 전신)에 다닐 때 형인 박희도가 "학교에 다니는 것도 중요하지만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다. 미국으로 가서 비행술을 배워 독립전쟁에 참가하라"고 해서 학교를 중퇴하고 미국으로 왔다. (박희도는 3.1 운동 당시 독립선언을 했던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한 명이었으나 일제말기에 변절한 것으로 돼 반민특위에 체포되기도 했다.) 박희성은 1920년 2월 비행학교가 개교하자마자 입교해 정몽룡 조종익 등 다른 한인생도 23명과 함께 비행술을 배우기 시작했다. 임정이 박희성을 이 학교에 파견했다는 주장도 있으나 이에 대해서는 보다 확실한 검증이 필요하다. 박희성은 같은 해 말 김종림의 농원이 타격을 입으면서 비행학교가 기능을 못하게 되자 이듬해 1월 비행학교 소재지인 윌로우스와 가까이 있는 새크라멘토 소재 미국인 비행학교에서 훈련을 계속했다. 박희성의 소개로 이용근도 3월부터 이 학교에서 훈련을 계속했다. 1920년 3월 31일자 신한민보는 박희성.이용근 등 한인 비행학생 4명이 "3월 20일 윌로우스 우리 군단에서 사용하던 우리 비행기를 연마하여 가지고 박희성씨가 타고 그 외 3명은 배종하고 비행교사는 자기 비행기를 타고 박씨와 같이 공중에 쌍으로 날아 노다이(?) 운동장에 감에 수천 명 군중은 모두 공중을 향하여 '핼로우 보이'하고 수건을 휘둘렀다. 박희성씨가 서서히 내림에 수천 명 남녀 군중은 한인소년비행대장이라 부르며 치하함을 마지않고 혹은 태극기도 만져보며 혹은 박희성씨와 악수도 하는 광경은 참으로 우리 비행학생들의 흥기를 돋우었는데 그 군중에 서서 보는 일인들은 눈이 둥그레져 보았다더라."고 당시 분위기를 전하고 있다. 박희성은 조종술이 매우 뛰어났던 것 같다. 그는 새크라멘토 비행학교에 다닐 때도 조종술이 워낙 뛰어나 학비가 면제됐으며 당시 신한민보도 "우리 비행학생 중에 가장 이름이 높은 박희성"이라고 표현했다. 그렇지만 박희성은 이해 4월 10일 캘리포니아주 레드우드시티 비행장에서 조종사자격 시험을 치르다가 기체사고로 죽음의 문턱까지 몰렸다가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다. 신한민보는 "박희성은 처음에는 시험을 잘 치르고 마지막 6000척을 오르는 시험을 치르다가 불행히 비행기가 흠이 나 300척 위에서 떨어졌는데 박씨가 탔던 비행기는 전부 파상되고 박씨는 30분 동안 기절하였다가 천행으로 생명을 보전하였는데 하체가(?) 크게 상하여 의사의 수술을 받고 겨우 생명의 위험을 면하였더라."며 당시 정황을 전하고 있다. <한우성 기고> wshan416@stanford.edu

2009-04-30

[숨겨진 미주 독립운동사] 임시정부 전투비행학교<12>

비행학교 모습을 담은 사진에 태극 문양이 선명한 비행기 3대가 확연하며 신한민보는 1920년 7월 2일자 '한국 비행기 4척'이라는 부제의 기사에서 "비행기 4대를 사오게 하며"라 하고 다음 달인 8월 5일자에서는 "이제 비행기 1대를 더 사서 연습을 충분케 하며"라고 보도했다. 일본은 이 비행학교에 대해 날카롭게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조선총독부 경무국장 등이 수신자로 돼 있는 일본의 1920년 9월 20일자 정보보고서 '국외정보: 최근 구미에 있어서 불령선인의 행동'(문서번호: 고경 제29493호 비수 12219호)의 요지는 "지난 7월 7일 제1회 졸업식을 거행했다. 당일 교장 노백린 총재 김종림은 장래 일본에 대한 독립전쟁은 비행기에 의존하는 것 외의 수단은 없다고 극언을 했다. 현재 연습생은 25명이고 무선전신 장치가 있는 완전한 비행기가 5대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당시 비행학교에 몇 대의 훈련기가 있었는지는 좀 더 규명이 필요한 부분이다. 훈련기에는 'K.A.C'라는 표시도 선명하다. 이것이 실제로 무엇의 약자인지는 확인되지 않고 있으나 지금까지 본국의 일부 학자들이 주장하는 바와 같이 대한인비행가구락부를 뜻하는 'Korean Aviation Corps'나 'Korean Aviation Circle'이나 'Korean Aviators Club'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이 비행학교를 깊이 있게 연구한 케네스 클라인 남가주대학(USC) 동아시아도서관장은 최근 인터뷰를 통해 "이 비행학교는 동호인 모임이 아니라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독립전쟁을 수행하기 위한 공군양성을 위해 공식적으로 추진한 곳이었다. 'K.A.C'는 '대한민국 공군'(또는 '대한민국 항공대')을 뜻하는 'Korean Air Corps'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미국의 경우도 비행대나 항공대라는 의미로 1차대전 때는 'Air Service'를 쓰다가 2차대전 전에 'Air Corps'로 바꾸었다가 2차대전이 지나서야 공군이라는 의미로 'Air Force'란 용어를 쓰기 시작했다. 공군에 대한 개념으로 적당한 한글을 찾지 못했던 재미동포들이 영어로는 보다 명쾌하게 표현했던 셈이다. 학생들이 자신을 사관생도라 여기고 재미동포들도 이 학교를 사관양성소라 부르면서 사관학교로 간주하는 장면도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 이무렵 비행학교 학생 16명이 창립회원이 돼 '대한인 비행가 구락부'를 조직했다. 한인 최초의 파일럿 클럽인 이 모임은 한장호가 회장이었으며 비행학교를 위한 김종림의 헌신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은제 컵을 선물했다. 당시 신한민보는 1920년 8월 5일 현재 김종림 농장의 모습을 "망망 무제한 평원광야의 3000여 에이커의 넓은 들"이라며 "이곳에 동포 32명이 같이 살고 비행학교에 학생 16명이 기숙하는데 8월 6일 이른 아침에 연습장에 나가서 비행기 연습을 봤다"고 쓰고 있다. <한우성 기고> wshan416@stanford.edu

2009-04-29

[숨겨진 미주 독립운동사] 임시정부 전투비행학교<11>

비행학교에는 훈련기가 3~5대 있었으며 주기종은 지금까지 알려진 바와는 달리 '스탠다드J-1'(Standard J-1)으로 확실시 된다. 지금까지는 '커티스 제니' 시리즈에 속하는 JN-4D 또는 같은 시리즈의 유사 기종으로 알려져 있었다. 보잉항공사 소속 항공역사가 마이클 롬바디는 윌로우스 한인비행학교 사진들에 담겨진 비행기가 "얼핏 보면 유명한 커티스 제니와 매우 흡사해 보이나 홀스캇 엔진이 조종석 뒤에 장착된 점과 날개의 세부사항 등으로 볼 때 SJ시리즈"라고 지난 2월4일 확인했다. 이보다 수일 앞서 똑같은 사진들을 검토한 샌디에고항공우주박물관 소속 전문가들인 마일스 타드와 앨런 렝거도 "커티스 제니가 아니라 스탠다드 J-1"이라고 강조했으며 미군사에 정통한 로버트 존슨 예비역 미공군중령 역시 "스탠다드 J-1이다."고 밝혔다. 스탠다드 J-1은 스탠다드 항공사가 슬로운(Sloan) 항공사의 비행기 'Sloan Model H'를 모형으로 개발한 훈련기였다. 스탠다드는 이 모델을 얻기 위해 슬로운을 사들였다. 1910년대 중반 미군 당국은 1차대전이 장기화하면서 미국도 어쩔 수 없이 개입될 것으로 보이자 항공전력을 강화하면서 주력 훈련기를 대량구매하기 시작했는데 스탠다드 항공사는 미군에 팔 마땅한 모델이 없기 때문이었다. 스탠다드는 1916년부터 스탠다드 J-1을 생산하기 시작했으나 미군의 수요를 충족시킬 만큼 양산하지 못하자 데이턴-라이트(Dayton-Wright) 피셔 바디(Fisher Body) 및 라이트 마티나스(Wright Martinas) 같은 회사도 스탠다드와 라이센스 계약을 맺고 이 비행기를 생산했다. 총 1601대가 생산된 스탠다드 J-1은 제1차 세계대전 마지막 해인 1918년에는 대당 6000달러 정도에 거래됐으나 종전과 함께 미군의 수요가 격감하고 잉여품이 남아돌자 가격도 떨어지기 시작했다. 따라서 임정이 1920년 비행학교를 열면서 이 비행기를 사들였을 때의 가격은 대당 6000달러를 훨씬 밑돌았을 것으로 보인다. 스탠다드 J-1은 당시 훈련기로서 첨단기종이었으나 경쟁기종이었던 제니 시리즈에 비해 엔진의 내구성이 떨어지는 단점이 있었다. <한우성 기고> wshan416@stanford.edu

2009-04-28

[숨겨진 미주 독립운동사] 임시정부 전투비행학교<10>

노백린과 김종림의 헌신을 중심으로 하는 한인사회의 단결을 바탕으로 비행학교는 급속히 자리를 잡으면서 학생들도 늘었다. 신한민보 1920년 3월 19일자는 "윌로우스 비행학교에 나아가 비행술을 연습하기로 결심한 학생은 건장한 청년 24명"이라고 전한다. 박희성.조종익.정몽룡.홍종만.최능익 등이다. 김종림이 학생수가 15명이라 한 지 약 1개월 만에 24명으로 6월 22일 현재 30명으로 늘었다. 이에 앞서 '윌로우스 데일리 저널' 3월 1일자는 노백린이 "비행학교는 3.1운동의 연장이며 조종사를 양성해 궁극적으로 대일전쟁에 동원될 수 있다고 털어놨다."면서 "비행학교가 40에이커를 사용할 계획이라는 얘기를 일축하며 3000에이커를 사용해도 되기로 이미 약속을 받았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노백린은 같은 인터뷰에서 "중국 여러 곳에 비행학교를 설립할 계획도 이미 세우고 있다."고 밝혔다. 이 학교는 6월 22일 첫 비행기를 소유하는데 이날 윌로우스 데일리 저널은 "비행기가 홀스캇(Hall-Scott) 엔진을 장착한 최신형이다. 한국인들은 비행기를 능숙하게 다루는 대로 한국으로 돌아가 여기저기 비행학교를 세울 계획"이라고 전했다. 같은 신문은 "한국인은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 보다 훨씬 더 야심적"이라고 평했는데 실제로 이 학교를 추진했던 한인들은 대단히 야심적이었다. 이 학교는 레드우드시티에서 이미 행해지던 중국인들의 대일전쟁을 위한 중국인 비행가 양성에 의해서도 자극을 받았던 것 같은데 당시 재미중국인들은 훈련기 1대를 갖추고 중국인 청년 수십 명을 훈련시키고 있었다. 이에 비해 한국인들은 초기부터 훈련기 최소 3대를 갖추고 동시에 교육할 수 있는 훈련생 규모도 100명 정도를 염두에 뒀으며 비행학교가 순항하면 동북아 여러 곳으로도 확산시킬 계획이었던 것 같다. 비행학교는 7월 5일 일반 동포 200여명이 참여한 가운데 공식 개소식을 거행했고 오림하와 미국인 수석교관 프랭크 브라이언트가 시범비행을 선보였다. 비행학교가 체계화되면서 노백린이 있을 때 함께 구상해 인선까지 마쳤던 '(대한인)비행가양성사'와 '비행가양성소'라는 시스템을 7월 25일 공식화하고 이를 위해 '비행가양성사 장정'을 채택했다. 학교가 자리 잡는 것을 본 노백린은 7월 16일 북미를 떠나 호놀룰루를 거쳐 이듬해초 임정에 도착했다. 이 장정은 비행가양성사의 출범 취지가 "조국의 독립을 목적으로 비행가를 양성하는데 있음"(1장 2조)이라고 규정했다. 부칙에서는 "본사는 본사의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비행가양성소를 설립함"(부칙 3조) "비행가양성소는 감독 1인을 두어 관리함"(부칙 4조) "비행가양성소의 감독은 임원부가 선정함"(부칙 5조)이라고 정했다. 편제상 비행가양성사가 비행학교(비행가양성소)의 상급기관이면서 후원기관으로 이에 따라 비행가양성사 초대 총재에 김종림 비행학교 초대 감독에 곽림대가 각각 취임했다. <한우성 기고> wshan416@stanford.edu

2009-04-27

[숨겨진 미주 독립운동사] 임시정부 전투비행학교<9>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 보고서에 따르면 1919년 약 1년 동안 재미동포의 독립의연금이 30388달러25센트인데 최대 기부자는 3400달러를 낸 김종림이었다. 이 일로 김종림은 임시정부로부터 감사장을 받았다. 김종림은 1920년초 노백린 임정 군무총장을 만나면서 자신의 일생에서 가장 중요한 업적이자 한국독립운동사와 국군사에도 길이 남을 중요한 결정을 한다. 그는 독립군 공군 양성 계획에 흔쾌히 동참하기로 하고 즉시 이를 결행했는데 이 한 해 지원금만 약 5만달러에 이를 것으로 보인다. 당시 달러의 현재 가치를 평가하기 위해 미국학계가 제시하는 환산기준 6가지 가운데 제일 높은 것을 택하면 800만달러 두 번째 높은 기준을 택해도 280만달러가 넘는 거액이다(2008년 기준). 신한민보는 1921년 10월 북가주 순행기에서 "10월 16일 김종림씨 댁에 당도하니 이는 광대하고 청결한 양옥인데 방안제구가 과연 부자의 집이라 할 만하고 또한 말과 뜰이 광활한데 이는 세집이 아니고"라면서 그의 농원에 대해서도 "10월 18일 김종림씨의 농원에 당도하니 망망하고 가히 없는 3300 에이커의 광대한 농원"이라고 썼다. 김종림은 안창호의 주도로 독립운동 자금을 만들기 위해 세워졌으나 실패한 북미실업주식회사의 폐업 정리를 1929년 김순권 곽림대와 함께 해결했다. 김순권은 재미한인사회가 낳은 불세출의 전쟁영웅이자 위대한 인도주의자인 김영옥 대령의 아버지로서 동지회 주요 회원이었으며 곽림대는 비행학교 감독을 맡은 인물이다. 독립수단으로 군사력을 중시했던 김종림은 1941년 미국도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고 미.일간에 전쟁이 벌어지자 환갑을 눈앞에 둔 나이에도 불구하고 캘리포니아주 방위군이 됐다. 미국 주방위군은 향토방어가 기본이나 일선으로 가기도 한다. 김종림 뿐 아니라 그의 두 아들 모두 미국 해군으로 태평양전선에서 일본과 싸웠다. 큰 아들 김진원은 알루샨열도에서 통신부사관으로 복무했고 작은 아들 김두원은 해군 상륙정 승무원으로 필리핀 해역에서 교전을 치른 후 미국이 승리하자 점령군으로 일본에 진주했으니 3부자 모두 군인이 돼 일본과 싸운 셈이다. 지금까지 확인된 기록만으로도 김종림의 행동을 통한 조국 사랑은 한국이 독립된 후 정부수립 전까지 계속된다. 김종림의 독립운동에서 눈에 띄는 또 한 가지는 당시 재미한인들이 안창호 지지파와 이승만 지지파로 나뉘어 있었다는 통설과 달리 김종림은 편파성 없이 두 지도자 모두를 지지하고 후원했다. 도산 생전에 그의 열렬한 지지자이며 후원자이며 동지였던 김종림은 1946년 동지회 북미총회 제5차 연례 대표회 의장을 맡을 정도로 이승만과도 비슷한 관계였으며 미주한인사회에서 지도자 위치를 유지했다. 1946년 장남의 결혼식 하객이 400명을 넘는 미증유의 대성황을 이루었다는 국민보의 보도 역시 당시 김종림의 위상을 짐작하게 한다. <한우성 기고> wshan416@stanford.edu

2009-04-26

[숨겨진 미주 독립운동사] 임시정부 전투비행학교<8>

이 무렵 김종림은 샌프란시스코에서 숙박업에 손을 대기도 하는 등 아직은 사업가로서 탐색기를 보내고 있으면서 1913년 안창호 조병옥 등과 함께 흥사단을 창설했다. 그는 당시 각 1명씩이던 8도 대표 가운데 함경도 대표였다. 제1차 세계대전 발발로 세계사의 흐름을 바꾼 1914년은 김종림의 인생도 바꾸었다. 그가 정확히 언제 농사에 손을 댔는지는 확실치 않으나 그가 이 해에 농사에 종사한 것은 분명하다. 그는 세계대전으로 세계곡물시장의 수급과 가격이 급변하는 격랑을 헤치며 쌀농사를 통해 거부로 떠올랐다. 전쟁으로 유럽이 황폐화되면서 미국이 반사이익을 얻는데 이 기간 캘리포니아에서 발흥한 3대 업종이 벼농사→수수농사→조선업 순이었다. 캘리포니아가 상업용 벼농사를 시작한 때가 1912년이므로 김종림이 이 시점에 캘리포니아에 있으면서 쌀농사에 손을 댄 것은 실로 천재일우의 기회와 장소에서 행해진 절묘한 선택이었다. 김종림과 가깝게 지냈다는 한 인사는 김종림이 이를 위해 평양에서 볍씨 1가마를 가져왔다고 전했다. 그는 최초의 재미동포 백만장자가 됐는데 순익만 1918년 약 28만달러 1919년 약 52만달러에 달할 것으로 추정된다. 돈을 벌 줄도 알았고 쓸 줄도 알았던 김종림은 거부를 쌓으면서 뭉칫돈을 내놓기 시작했는데 비행학교를 위해 일시불로 2만달러를 내고 매달 3000달러씩 지원하기로 했다. 김종림은 레드우드비행학교에서 조종술을 배워 독립전쟁에 참가하려는 한장호의 교육비를 이미 지원해주던 터였다. '윌로우스 데일리 저널'이 "김종림이 비행학교 설립을 이끌고 있다."고 보도한 것으로 봐 비행기 3대와 비행장 부지 구입 및 교관채용 등도 모두 김종림의 기부금을 주요 재원으로 삼았던 것으로 보인다. 김종림의 농토는 해를 거듭하면서 확장돼 1915년 최소 100 에이커 1916년 최소 280 에이커 1917년 최소 1030 에이커 1918년 최소 1800 에이커 1919년 최소 3300 에이커로 커갔다. 쌀농사로 거부를 축적한 김종림은 '백미대왕'(Rice King)이라는 별명을 얻으면서 기부에서도 '큰손'의 면모를 드러내기 시작해 1918년 신한민보 식자기계 구매를 위해 200달러를 기부했을 때 이 신문은 "이러한 연금은 10년 미국에 처음 있는 일"이라고 보도했다. 그는 교회 헌금 무연고 동포 병에 걸린 동포를 돕는 일에도 인색하지 않았고 그해 3월 치과의사의 딸인 최원희(미국이름 앨리스 최)와의 결혼식에 5000 달러라는 거금을 뿌려 세간의 화제가 되기도 했다. 러나 김종림의 심장 한 가운데에 있는 것은 역시 조선의 독립이었다. 신한민보에 따르면 1918년 8월 29일 한일병합 8주년을 맞아 북가주 한인 85명이 김종림의 저택에 모여 넓은 마당에 식당을 준비하고 자동차 12대로 헤드라이트를 밝힌 가운데 망국의 한을 삼키며 독립운동자금을 걷었다. <한우성 기고> wshan416@stanford.edu

2009-04-23

[숨겨진 미주 독립운동사] 임시정부 전투비행학교<7>

임정 재무총장 이시영 명의로 감사장(1920년 10월 16일자)을 받은 독립연금 최대기부자 재미동포 4명인 김종림.임준기.신광희.김승길 모두 쌀농사로 부자가 된 인물들이었다. 이처럼 쌀농사로 큰돈을 번 재미동포 가운데 선두주자가 재미동포 백만장자 1호이자 독립운동가였으며 신문인이자 사회봉사자였던 김종림(1884-1973)이었다. 그는 20세를 전후해 빈손으로 미국으로 와 조국도 없는 가난한 이민자로서 제1차 세계대전이라는 난세를 기회로 삼아 불과 10년 안팎에 막대한 부를 축적한 풍운아였으며 이를 바탕으로 임시정부의 독립군 공군 양성이라는 야심찬 계획의 착수를 가능하게 했던 장본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업적에 대해서는 평생 철저히 침묵으로 일관 자녀들조차 아버지의 업적에 대해 모르던 인물이었다. 생전에 그와 가깝게 지냈다는 한 인사에 따르면 김종림은 평양에서 우체국 일을 하다가 농장노동자로 하와이로 왔으며 미국에 오는 경비 때문에 농장주에게 졌던 빚을 수 년 동안 일 해 모두 갚고 자유의 몸이 돼 본토로 왔다. 신한민보에 따르면 함경도 원산 출신인 그가 유타주 솔트레이크시티에 부설되던 철도 건설 노동자 신분으로 앨러미다(Alameda) 선편으로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것이 1907년 1월 2일이다. 이후 각종 기록으로 확인되는 기간만 해도 약 40년에 걸치는 김종림의 조국사랑과 기부와 봉사는 자신의 삶조차 지탱하기 어렵던 철도건설노동자 시절부터 시작된다. 그는 그해 공립협회에 의연금 10달러를 기부한데 이어 이듬해 정월에는 공립신보의 신문기계 구입을 위해 30달러를 기부했다. 가난한 철도노동자로서는 거금이었다. 공립협회는 도산 안창호 선생이 1905년 리버사이드에서 창립해 후에 국민회로 통합된 민족운동단체고 공립신보는 이 단체의 기관지다. 김종림은 철도노동자의 삶을 청산하고 1908년 캘리포니아주로 이주한 직후 아세아실업주식회사 설립을 주도하는 것을 시작으로 독립운동가이자 사업가로서 면모를 서서히 드러내기 시작한다. 아세아실업주식회사는 주식태동실업회사의 전신으로 대한인국민회가 사업을 주관해 만주와 연해주에 독립군 근거지 육성을 목적으로 했던 사업체였다. 이때까지만 해도 성공한 사업가는 아니었던 김종림은 적으나마 돈이 있으면 돈을 내고 돈이 없으면 식품이나 자신의 시간을 내놓았으며 이승만 이상설 등과 함께 조선 내 고아를 돕는 구휼기관인 대동고아원 설립을 주도하기도 했다. 그는 언론을 통한 독립운동에도 깊은 관심을 보여 공립신보의 사무원으로 노력 봉사도 했으며 공립신보와 신한민보의 인쇄인을 맡기도 했고 후에는 국민보를 위해서도 헌신했다. 그는 특히 교육에 각별한 관심을 보여 한인 2세를 위한 한글학교나 유학생들을 위해 장학금이나 시계를 선물하기도 했다. 훗날 비행학교의 최대 재정후원자로서 독립군 공군 양성의 대부가 되는 단초가 엿보이는 장면이다. <한우성 기고> wshan416@stanford.edu

2009-04-22

[숨겨진 미주 독립운동사] 임시정부 전투비행학교<6>

한인청년들이 미군에 들어가 조종사가 되려는 목적은 독립전쟁이었다. 전쟁 중이던 1918년 미군에 자원입대한 이성창도 비행기복역병이 됐고 1919년에는 최자남과 박낙선이 캘리포니아주 샌디에고 육군비행학교에서 함께 훈련받았다. 같은 해 펜실배니아주 에싱턴(Essington) 비행학교를 졸업한 노정민은 해군비행사가 됐다. 최자남은 1919년 7월 육군비행학교에서 보낸 편지에서 "비행자중에 부상이 있을 때는 두려움도 없지 아니하되 다시 정신을 가다듬어 비행기에 올라 태평양에 높이 떠 쥐 같은 왜왕의 머리를 부술 예상을 느낄 때에는 대한공화국 만만세 소리가 절로 나온다."면서 한인청년들의 지원을 권했다. 노정민은 1919년 10월 "천강지손 반도민족은 국가의 치욕을 씻고 민국의 국민 된 자격과 직책을 하려면 비행술을 연구치 아니하고는 조국을 빛내며 후일에 공중전쟁을 시험하며 세계열강과 더불어 문명을 서로 다툴 수 없다 하나이다."며 신한민보에 광고까지 냈다. 한인청년들은 민간 비행학교를 통해서도 비행을 배웠다. 노백린이 비행학교 설립을 위해 샌프란시스코에서 동남쪽으로 약 26마일 떨어진 레드우드시티(Redwood City)에 있는 미국인 비행학교 '레드우드 비행학교'를 방문한 1920년 2월 5일 이곳에는 이용근.이용선.이초.장병훈.한장호.오림하 등 한인청년 최소 6명이 조종사가 되기 위해 날갯짓을 하고 있었다. 이 가운데 오림하를 제외한 5명 전원은 청년혈성단 발기인들이다. 청년혈성단은 한인청년들이 조국의 독립을 위해 생사를 함께 할 것으로 맹세하며 1919년 5월 캘리포니아에서 결성한 결사단체였다. 민간인 비행학교를 통해 조종사가 되려는 한인청년들의 가슴에도 오로지 조국의 독립만 있던 셈이다. 노백린의 독립군 공군 양성과 이를 위한 비행학교 창설에 재미동포사회가 기다리고 있던 듯 동참할 수 있었던 또 다른 중요한 이유는 경제력이었다. 당시 재미동포사회의 경제적 핵심은 오늘날과 달리 북가주의 농업 특히 쌀농사를 통해 축적된 부였다. 캘리포니아는 19세기말까지는 쌀 생산이 전무하다시피 했으나 1912년부터 상업적 쌀농사를 시작했고 그로부터 불과 2년 후에 세계대전이 터지면서 유럽이 폐허로 변하자 세계곡물시장의 수급이 급변하면서 쌀농사로 톡톡히 재미를 봤는데 캘리포니아 쌀농사의 메카가 바로 윌로우스를 끼고 있는 대평원이다. 구한말 미국으로 간 한국인들도 다수가 이 시기 쌀농사를 통해 부자가 됐고 이들의 경제력은 이 무렵 독립운동의 버팀목이었다. 1919년 재미동포의 독립자금 기부액 88000달러 가운데 49%에 달하는 42955달러가 캘리포니아 한인농장의 곳간에서 나왔다. 고정휴 교수(포항공대)의 논문 '상해임시정부의 초기 재정운영과 차관교섭'(한국사학보 제29호)에 따르면 1919년5월~1920년12월10일 재정수입 131909달러(상하이 실버 달러) 가운데 재미동포 기부금이 45%였다. <한우성 기고> wshan416@stanford.edu

2009-04-21

[숨겨진 미주 독립운동사] 임시정부 전투비행학교<5>

스탁튼 데일리 레코드는 군에 있을 때 조지 리의 마지막 계급을 상사라고 쓰고 있다. 이와 관련 로버트 존슨 예비역 미공군중령은 "미군은 1차대전 때에는 비행부사관이 더러 있었으며 2차대전 초까지만 해도 비행부사관이 소수 있다가 2차대전을 거치면서 장교만이 조종사가 됐다"고 확인하고 "조지 리가 그 기간에 156회나 출격했다면 하늘에서 살다시피 해도 모자랄 경이적 기록"이라고 덧붙였다. 장태한 캘리포니아주립대 교수(UC Riverside 소수인종학)는 "당시 미국은 극심한 인종차별이 합법적이어서 조지 리가 파일럿임에도 아시아계라서 장교 계급을 주지 않았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신한민보는 조지 리가 전쟁 중에 독.불국경지대에서 공기선을 탔다고 전하는데 이는 비행선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당시는 정찰기로 비행선이 사용되곤 했는데 존슨 중령은 "비행선 파일럿이 전투기 파일럿이 되기도 했기 때문에 조지 리의 행적은 더 조사해야 봐야 확실히 알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미육군의 징집대상자 등록카드는 조지 리가 키가 작고 땅땅한 체격을 가졌으며 가족관계는 아버지와 단 둘이 사는 미혼이라면서 국적을 일본이라고 기록하고 있어 당시 조국을 잃고 이민 또는 망명 생활을 하던 한국인들의 비애를 다시 한 번 느끼게 한다. 조리 리가 비행사가 되기 위해 여러 차례 시도 끝에 미군에 입대한 직접적 동기는 확인되지 않고 있으나 1차대전이 터지고 미국도 참전하자 당시 미국에 살던 재미동포 청년 다수가 미군에 입대하면서 "전쟁술을 배워 조국의 독립에 기여하겠다."는 얘기들을 많이 했다는 기록으로 미뤄 그의 경우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조지 리가 입대할 무렵 신한민보가 이들 부자의 농토를 60에이커라고 했다가 몇 개월 후에 다시 30에이커라고 한 것이나 아버지 이두형이 1913년 8월 도산 안창호 선생을 자신의 집으로 방문해달라고 초청하면서 "왕복 여비는 못 드려도 편도 여비는 부담하겠으며 오시면 마차로 마중하겠습니다."는 요지의 편지를 띄운 것으로 봐서 이들 부자의 살림이 그리 넉넉한 편은 아니었던 듯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 이두형은 대한인국민회 회원으로서 오랜 기간 적으나마 기부도 계속하고 한글학교에서 봉사도 할 뿐 아니라 1921년 3월 1일에는 혼자 있게 돼 3.1절 기념식을 동포들과 함께 치르지 못하자 "새벽 4시에 혼자 책상에서 마음과 정성과 힘을 다해 만세삼창을 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는 인물이다. 지금까지는 미국 레드우드 비행학교나 윌로우스 비행학교 출신 비행사들이 한국인 최초의 비행사라는 것이 정설이었으나 이들이 비행사자격증을 획득한 것은 1920년이다. 필라델피아에 있는 에싱턴(Essington) 비행학교를 나와 미 해군비행사가 된 노정민이 필라델피아에서 시카고까지 비행한 것이 1919년이다. <한우성 기고> wshan416@stanford.edu

2009-04-20

[숨겨진 미주 독립운동사] 임시정부 전투비행학교<4>

조지 리(George Lee)가 한국인 최초의 파일럿으로 날아오르는 것도 이 맥락이다. 많은 한국인들이 한국인 최초의 파일럿으로 알고 있는 안창남이 일본 비행학교를 마치고 비행사가 된 1921년 보다 3년 빠른 시점이다. 조지 리는 1896년 인천(당시 제물포) 출신으로 1918년 미군 조종사가 돼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 156회 출격을 기록한 전쟁영웅이다. 그는 6~7세 때인 1903년 3월 30일 아버지 이두형을 따라 세칭 이민선으로 불리는 갤릭 호를 타고 미국으로 갔는데 파일럿으로서 그의 행적은 그가 전쟁영웅으로 금의환향한 소식을 전한 당시 신문들을 통해 엿볼 수 있다. 미국 현지신문 '스탁튼 데일리 레코드'(Stockton Daily Record)는 1918년 12월 18일자에서 이 청년영웅의 귀향을 '조지 리 명예와 신부를 얻다'라는 제하의 머리기사로 보도하며 비상한 관심을 보였다. 당시 미국의 인종차별을 고려하면 대단히 파격적이며 우호적인 관심이었다. 이 신문에 따르면 조지 리는 북가주 맨티카(Manteca)에서 2년 동안 사탕수수 농사를 짓다가 미국이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자마자 아버지 몰래 미 육군항공대에 자원입대했다. (미국 상선이 독일 잠수함의 무차별 공격을 받자 미국이 독일에 선전포고한 때는 1917년 4월이었다.) 미군은 처음에는 그의 입대를 받아들이지 않았으나 그는 포기하지 않고 여러 차례 시도한 끝에 미군에 들어갔다. 당시 미국은 미국 시민권자가 아니면 원칙적으로 미군에 복무할 수 없었다. 그는 텍사스주 샌안토니오(San Antonio)에 있는 켈리필드(Kelly Field) 비행장에서 6개월간 비행훈련을 받은 후 사우스캐롤라이너주와 뉴욕주 롱아일랜드(Long Island)에서 계속 훈련받았으며 롱아일랜드에 있는 미첼필드(Mitchell Field) 비행학교를 졸업하면서 정식으로 파일럿이 됐다. 그는 1918년6월 유럽전선으로 보내졌는데 프랑스에 도착한 후 3개월간 다시 훈련을 받은 후 실전에 배치됐고 전쟁이 끝날 때는 이미 156회 무사고 출격을 기록하고 있었으며 그의 지휘관은 이를 치하해 미 육군항공대의 표식이 새겨진 반지를 수여했다. 이 신문은 조지 리가 북가주 트레이시(Tracy)로 귀향할 당시 21세로 군에서 명예제대를 했으며 전장에서 개선한 후 뉴욕에 사는 한 젊은 여성과 결혼했는데 이들의 사랑은 그가 롱아일랜드에서 비행학교 생도로 있을 때 시작된 것으로 조지 리는 수개월 내에 뉴욕으로 돌아가 가정을 이루고 그의 장인이 경영하는 고무사업을 함께 할 계획이라고 전하고 있다. 신한민보에 따르면 조지 리는 조선에 도움이 되기 위해 전기기계학을 공부할 계획을 갖고 1920년 6월 부인이 기다리고 있던 뉴욕으로 갔으며 부인은 미국여성인데 둘 사이에는 곧 첫 아들이 태어났다.(1919년 6월 7일자 1920년 7월 8일자) <한우성 기고> wshan416@stanford.edu

2009-04-20

[숨겨진 미주 독립운동사] 임시정부 전투비행학교<3>

미국 동부지역을 순방하면서 이승만과 서재필 등을 만나 독립운동 방략에 대해 논의했으나 기대했던 것만큼 성과를 얻지 못한 노백린은 시카고를 거쳐 서부 한인사회를 방문했다. 비행학교 설립에 대한 사전조율 없이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노백린을 맞는 성대한 환영식이 열린 날이 1919년 1월15일이고 비행기 3대와 비행장 부지 40에이커 구매 교관과 정비사 채용 학교건물 임대차 계약 학생 15명 모집 등이 모두 그 다음 달인 2월 19일 전에 끝난 것으로 봐서 노백린 장군과 김종림 선생 등의 비행학교 설립은 일사천리로 추진된 것으로 보인다. 노백린은 처음부터 군사력을 통한 독립 쟁취를 중시했던 인물로 제1차 세계대전을 지켜보며 공군의 효율성에 주목하다가 임시정부의 군무총장이 되자 자신의 지론을 공군 양성으로 정책화하기 시작했다. 노백린은 군무총장 자격으로 이 학교를 만들면서 곧 바로 이동휘 임시정부 국무총리와 교신을 통해 임정에 보고도 하고 지침도 받으면서 임정의 공식정책으로 추진했다. 공군력을 키워 독립전쟁에 활용하려는 노백린의 전략은 재미동포사회와 맞아떨어졌다. 라이트 형제에 의해 비행기가 발명된 이래 비행 관련 뉴스만 있으면 떠들썩해지는 미국에 살던 한인들은 미국도 결국 참가한 제1차 세계대전을 보면서 조국의 독립을 위해서도 군사력 특히 공군력을 한층 높이 평가하던 터였다. 이미 노백린의 미국 본토 방문 전부터 공군력과 독립전쟁이라는 것이 하나의 묶여진 화두로 재미한인사회에 등장했으며 실제로 이미 한인청년 다수가 적극적으로 하늘과 인연을 맺기 시작했다. 말하자면 재미한인사회는 비행기와 공군력에 대한 이해가 깊었을 뿐 아니라 많은 한인청년들이 조종술을 배우고 있어 사회적 인적 하부구조가 갖춰지고 있던 셈이었다. 이 같은 화두를 반복적으로 던지면서 하나의 시대정신으로 이끌었던 장본인은 다름 아닌 신한민보였다. 이 무렵 신한민보는 도산 안창호 선생이 세운 민족운동단체인 대한인국민회의 기관지 역할을 하면서 특히 한일합방으로 조선의 국권이 침탈되던 1910년에서 한국인에 의한 민족적 언론이 조선에 등장하기 시작하는 1920년 봄까지 이르는 기간 동안에는 독립운동에 있어서 독보적 무게를 지닌 정신적 지주였다. 발행처인 미국은 물론 멕시코 연해주와 심지어 조선에도 독자를 갖고 영향력을 발휘했다. 신한민보는 "공기선이 향후 정찰기나 폭격기로 크게 활용될 것"이라거나(1909년 3월 10일) 제1차 세계대전을 예고하고 이를 이용해 한민족이 장래를 모색할 것을 권하면서 비행기 사진을 함께 싣는다거나(1914년 1월 29일) '전쟁과학' 난을 만들어 무기로서 비행기를 집중적으로 소개하는 시리즈 기사를 게재하는(1916년 9월8일~10월5일) 등 비행기에 대한 관심을 촉구했다. 신한민보의 캠페인은 실제로 한인청년들에게 영향을 미친 듯 한인청년들은 비행을 배우기 시작했다. <한우성 기고> wshan416@stanford.edu

2009-0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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